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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이라는 이름에 담긴 누에치기의 역사와 조선의 산업 정책

by 지방소식 2025. 6. 9.

잠실은 왜 '잠실'일까? 누에치기와 조선시대 산업정책에서 유래한 이 지명의 깊은 뜻과 그 공간의 변화를 살펴본다.

서울의 동남부에 위치한 '잠실'은 오늘날 대형 쇼핑몰, 아파트 단지, 롯데월드타워, 스포츠 경기장 등이 집결된 거대한 도시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지명이 품고 있는 의미는 현대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조선 시대의 산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잠실(蠶室)’이라는 단어에는 국가 주도의 양잠(養蠶) 산업과 누에치기의 전통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 잠실에서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누에치기와 뽕잎 수확을 하는 모습을 그린 전통 양잠 장면 일러스트
잠실

조선은 중앙집권적 산업정책을 추진하면서 누에치기와 비단 생산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그 중심지로서 오늘날의 잠실 일대가 특별히 관리되었다. 본 포스트에서는 지명 ‘잠실’에 얽힌 역사적 의미, 조선의 양잠 산업 정책, 그리고 그 유산이 어떻게 오늘날 공간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지를 탐색해본다.

 

 

‘잠실(蠶室)’의 한자적 의미

‘잠(蠶)’은 누에를 의미하고, ‘실(室)’은 방이나 집을 뜻한다. 즉, ‘잠실’은 누에를 기르는 장소, 다시 말해 ‘누에 사육실’이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단순히 지명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조선 시대 국가 산업체제의 일환으로 조직된 양잠 사업의 거점을 나타낸다.

 

실제 역사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서울 남쪽의 한강변에는 왕실과 관청에서 직접 관리하는 양잠장이 있었고, 이 지역이 바로 잠실이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궁중에서 사용할 비단을 위한 누에를 이곳에서 길렀다고 전해진다.

왜 한강 섬이었나? 입지의 역사적 배경

현재의 잠실은 육지처럼 보이지만, 과거에는 강물 사이에 떠 있는 섬, 즉 ‘하중도’였다. 조선시대 한강에는 범람이 자주 일어났고, 이런 땅은 비옥했으며 교통이 제한되어 누에와 뽕나무 관리에 적합했다. 외부 간섭 없이 국가가 통제하기 용이한 위치였기에 잠실이라는 산업용 장소가 형성되었다.

 

 

조선의 양잠 정책과 잠실의 기능

조선은 중국의 명과 교역하는 데 있어 비단은 매우 중요한 물품이었다. 이에 따라 국가적으로 누에를 기르고 비단을 생산하는 시스템을 장려했다. 특히 왕비나 중전이 누에치기를 시범적으로 보이며 백성들에게 권장하던 ‘잠친례(蠶親禮)’라는 궁중 의례도 있었다.

 

이러한 국가 행사와 실질적인 누에 사육이 서울 근교인 잠실에서 이뤄졌으며, 오늘날의 ‘잠실나루’라는 지명도 이러한 역사와 연결된다. 나루터는 조운(漕運)의 물류 관문이기도 했기에, 비단 생산 후의 유통에도 유리한 위치였다.

잠실의 변화: 산업지에서 주거·상업 중심지로

양잠 산업은 근대화 이후 점차 쇠퇴하였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강변은 방치되거나 농경지로 전락했다. 하지만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강남 개발계획’과 함께 잠실은 아파트, 도로, 공공시설이 들어서는 대규모 주거단지로 재탄생한다.

 

특히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와 함께 잠실운동장, 롯데월드, 한강공원 등이 조성되며, 산업 유산의 공간은 완전히 새로운 성격으로 바뀌었다.

 

 

역사적 지명의 흔적은 남아 있는가?

현재의 잠실에는 누에치기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일부 지명과 유물에서 과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잠실본동’, ‘잠실나루역’, ‘잠실사거리’ 등의 명칭이 그 유래를 담고 있다. 또한 송파구청 및 문화재청이 소규모 전시를 통해 이 지역의 역사성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도시가 고도화되면서 지명은 그 자체로 역사의 박물관이 된다. 잠실이라는 이름 하나에 담긴 조선의 산업정책, 궁중 의례, 지형의 특성과 같은 요소들은 오늘날에도 도시 탐방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맺으며: 이름은 공간의 기억이다

‘잠실’은 단지 지역의 이름이 아니라, 과거 국가가 산업을 어떻게 조직했고, 그에 맞춰 공간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도시는 끊임없이 변하지만, 지명은 과거의 기능과 정체성을 현재로 이어주는 중요한 문화적 매개다.

 

잠실을 지나칠 때, 단지 고층 건물과 상업시설만이 아니라, 그 이름 속에 숨은 ‘누에 방’의 고요한 풍경을 한 번쯤 상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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